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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성경일독학교 정리, 9-1강] 구약성경읽기 실제 - 창세기, 출애굽기 (1)

by 사랑과희망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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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일독학교 정리, 9-1] 구약성경읽기 실제 - 창세기, 출애굽기 (1)

https://www.youtube.com/watch?v=cROhlBQcr60 

 

창세기를 읽을 때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인가가 주제이여야 된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인가

누가 대를 이어가는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기억을 이을 자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손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이런 말이다.

 

이것이 창세기 12장부터, 히브리 민족의 역사인 12장부터 50장까지의 관점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지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였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 다음에 야곱, 다음에 야곱의 열 두 아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야곱의 다른 별명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후손 만들기의 결정체로 나타나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읽을 때 어떤 절차를 거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되는가의 원리를 찾아내야 된다.

 

아브라함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야 되고 이삭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우선 족장사를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오해를 좀 씻었으면 좋을 게 있다.

(*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역사를 원역사 라고 한다면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나오는 역사를 족장사 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브라함 그러면 세계 역사하고 잘 연결을 못 시키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성경에만 있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렇게만 생각한다.

 

홍길동 그러면 실제 인물은 아니다.

홍길동 이미지처럼, 아브라함도 두리뭉실하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정도로 생각하지, 그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부터 쭉 공부해온 역사에 잘 연결을 못 시키는데 그것부터 해야 된다.

아브라함이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이렇게 어디서부터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브라함이 어디쯤에 있었던 사람인지 우리가 알고 있다.

우선 문명으로 치면 어느 문명인가. 에집트 문명인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가.

메사포타미아 문명 속에서도 갈대아우르라고 그랬다.

 

우루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 수메르 문명의 최고치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르남무시대: 수메르 약 3기 정도 되는 시대의 때가 세계 역사 속에서 많은 자료와 문헌들을 남기고 있는 때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이 문화권 속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발견된 토판, 흙으로 구워서 나온 문서들을 토판이라고 그러는데,

마리 토판이라든지 이런 토판들이 있는데 그런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많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살던 때의 문화를 제가 얘기를 하는거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공중에 띄어 놓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도 발에 신발 신고 땅 디디고 살면서 우리와 같은 문화를 즐기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당시는 야금술이라든지(금 만드는 것), 자기 만드는 것, 문서 같은 것들이 많이 교류됐던 시대이다.

학교도 있었고, 많은 저술 활동이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학교도 어느 정도냐면 음악 학교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악보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그런 자료들도 많이 있었다. B.C. 2166년쯤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당시 세상 문화 속에 얼마든지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 이주하는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하도록 만들고, 많은 그 아브라함의 신앙이 한두 해 하루 이틀 생긴 신앙이 아니다.

자세하게는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줄 알았고 자기의 인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 이주하면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대로 갈대아우르에서 이렇게 거쳐서 이제 이쪽으로 온다. 이주해온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스토리는 다 잘 아시기 때문에 아는 것은 제가 여러분 될 수 있는 대로 얘기하지 않고 꼭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들 중에,

아브라함의 불러내심은 세상 속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어떻게 해내는 것 같은, 구별해 내심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 창세기 12~50: “아브라함을 불러내심의 특징 –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하는 원리를 찾아내게 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음.

- 아브라함을 교회로 시작하시면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심. 출발, 떠남.

- 에클레시아: 불러내심, 세상 속에서 따로 불러서 구별하심 -> 교회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의미

 

아브라함을 에클레시아, 교회로 시작하시면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심, 출발이다. 떠남.

자기가 익숙했었던 곳 우루에서부터 떠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 이주한 땅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두 개의 스테레오를 놓아라.

 

하나는 이 바벨론 지역 갈 때와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땅으로 오게 하는 아브라함의 이동.

 

그 다음 그 후손들이 커져서 국민 만들기 끝났었을 때에 에집트의 고센 지역에 몇 백만 명의 백성이 공동체가 됐을 때 다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던 그 땅, 그 후손이 번성했던 에집트에서 다시 불러내셔서 다시 오게 하는 땅이 똑같은 땅이다. 가나안 땅.

신약의 얘기로 하면은 팔레스타인 땅.

 

가나안으로의 집결 지정학적인, 지구, 지형속에 하나님이 자리 잡으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좌소로 쓰신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는 뭐가 있어야 될 것 같나.

이곳에는 템플이 있어야 된다.

템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좌가 있는 곳이다.

 

이제는 예루살렘이다 가나안이다. 이렇게 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냐면,

이곳은 하나님의 통치 좌소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지를 지구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나타내신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라. 그것이 가나안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다.

이삭을 낳게 되면서 다음에 이 나라의 국민인 이삭의 특징을 보여주시는데

이삭은 혈통을 쫓아서 나올 수 있는 아들이다. 하나님이 출생시키신 아들.

 

몸으로 육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아들인데 나왔다.

육으로는 나올 수 없는 내 아들 이 말은 뭐냐면 이 나라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인간의 혈통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낳아야 들어가는 나라.

하나님이 낳다, 거듭나다라고 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다,

나다라고 하는 때 쓰는 이 말은 남성의 출산 행위를 나타낼 때 쓰는 동사이다.

이제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즉 이 나라의 국민들은 뭐냐 누군가 낳아야 된다.

옛날의 성품이 변화되는 게 아니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

 

다시 태어나는데 혈통을 쫓아서는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혈통을 쫓아서 하나님이 낳아야 된다.

하나님의 출산 행위와 같은 아담의 계열을 쫓아서 나오는 자식이 아니다.

 

둘째 아담을 쫓아서 나와야 된다.

나중에 바울은, 바울 신학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아담이다.

아담을 쫓아서 나오는 혈통이 아니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서 나오는 혈통을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담의 혈통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성령을 쫓아 놨다고 그랬다.

육신의 혈통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으로 다시 대표되는 두 번째 아담이다.

진정한 사람이다.

 

출생뿐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등에 제물을 태울 장작을 메고 올라가는 그 장면이나,

예수님이 등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서 올라가는 장면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이나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것을 예로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아들 이삭의 죽음과 대속을 통해서 그 혈통이 이제 이어져 나갈 거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스토리가 족장사에 들어있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삭이 죽지 않고 수풀에 걸린 수양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부활한다.

부활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그것이 이삭의 생애이다.

대속의 죽음 우리를 불러내심. 그 다음에 대속의 죽음.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심

이런 의미들이 들어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인가 했을 때 그 의미들이 원리로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를 읽을 때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인가가 주제이여야 된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인가

누가 대를 이어가는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기억을 이을 자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손인가,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이런 말이다.

 

이것이 창세기 12장부터, 히브리 민족의 역사인 12장부터 50장까지의 관점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지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였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 다음에 야곱, 다음에 야곱의 열 두 아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야곱의 다른 별명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후손 만들기의 결정체로 나타나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읽을 때 어떤 절차를 거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되는가의 원리를 찾아내야 된다.

 

아브라함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야 되고 이삭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우선 족장사를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오해를 좀 씻었으면 좋을 게 있다.

(*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역사를 원역사 라고 한다면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나오는 역사를 족장사 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브라함 그러면 세계 역사하고 잘 연결을 못 시키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성경에만 있는 어떤 위대한 인물이렇게만 생각한다.

 

홍길동 그러면 실제 인물은 아니다.

홍길동 이미지처럼, 아브라함도 두리뭉실하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정도로 생각하지, 그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부터 쭉 공부해온 역사에 잘 연결을 못 시키는데 그것부터 해야 된다.

아브라함이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이렇게 어디서부터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브라함이 어디쯤에 있었던 사람인지 우리가 알고 있다.

우선 문명으로 치면 어느 문명인가. 에집트 문명인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가.

메사포타미아 문명 속에서도 갈대아우르라고 그랬다.

 

우루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 수메르 문명의 최고치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르남무시대: 수메르 약 3기 정도 되는 시대의 때가 세계 역사 속에서 많은 자료와 문헌들을 남기고 있는 때이다.

함무라비 법전이 이 문화권 속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발견된 토판, 흙으로 구워서 나온 문서들을 토판이라고 그러는데,

마리 토판이라든지 이런 토판들이 있는데 그런 고고학적인 자료들이 많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살던 때의 문화를 제가 얘기를 하는거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공중에 띄어 놓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도 발에 신발 신고 땅 디디고 살면서 우리와 같은 문화를 즐기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 당시는 야금술이라든지(금 만드는 것), 자기 만드는 것, 문서 같은 것들이 많이 교류됐던 시대이다.

학교도 있었고, 많은 저술 활동이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학교도 어느 정도냐면 음악 학교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악보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그런 자료들도 많이 있었다. B.C. 2166년쯤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당시 세상 문화 속에 얼마든지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 이주하는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하도록 만들고, 많은 그 아브라함의 신앙이 한두 해 하루 이틀 생긴 신앙이 아니다.

자세하게는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줄 알았고 자기의 인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 이주하면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대로 갈대아우르에서 이렇게 거쳐서 이제 이쪽으로 온다. 이주해온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스토리는 다 잘 아시기 때문에 아는 것은 제가 여러분 될 수 있는 대로 얘기하지 않고 꼭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들 중에,

아브라함의 불러내심은 세상 속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어떻게 해내는 것 같은, 구별해 내심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 창세기 12~50: “아브라함을 불러내심의 특징 –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하는 원리를 찾아내게 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음.

- 아브라함을 교회로 시작하시면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심. 출발, 떠남.

- 에클레시아: 불러내심, 세상 속에서 따로 불러서 구별하심 -> 교회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의미

 

아브라함을 에클레시아, 교회로 시작하시면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심, 출발이다. 떠남.

자기가 익숙했었던 곳 우루에서부터 떠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 이주한 땅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두 개의 스테레오를 놓아라.

 

하나는 이 바벨론 지역 갈 때와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의 땅으로 오게 하는 아브라함의 이동.

 

 

 

그 다음 그 후손들이 커져서 국민 만들기 끝났었을 때에 에집트의 고센 지역에 몇 백만 명의 백성이 공동체가 됐을 때 다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던 그 땅, 그 후손이 번성했던 에집트에서 다시 불러내셔서 다시 오게 하는 땅이 똑같은 땅이다. 가나안 땅.

신약의 얘기로 하면은 팔레스타인 땅.

 

가나안으로의 집결 지정학적인, 지구, 지형속에 하나님이 자리 잡으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좌소로 쓰신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는 뭐가 있어야 될 것 같나.

이곳에는 템플이 있어야 된다.

템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좌가 있는 곳이다.

 

이제는 예루살렘이다 가나안이다. 이렇게 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냐면,

이곳은 하나님의 통치 좌소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지를 지구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나타내신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라. 그것이 가나안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다.

이삭을 낳게 되면서 다음에 이 나라의 국민인 이삭의 특징을 보여주시는데

이삭은 혈통을 쫓아서 나올 수 있는 아들이다. 하나님이 출생시키신 아들.

 

몸으로 육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아들인데 나왔다.

육으로는 나올 수 없는 내 아들 이 말은 뭐냐면 이 나라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인간의 혈통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낳아야 들어가는 나라.

하나님이 낳다, 거듭나다라고 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다,

나다라고 하는 때 쓰는 이 말은 남성의 출산 행위를 나타낼 때 쓰는 동사이다.

이제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즉 이 나라의 국민들은 뭐냐 누군가 낳아야 된다.

옛날의 성품이 변화되는 게 아니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

 

다시 태어나는데 혈통을 쫓아서는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혈통을 쫓아서 하나님이 낳아야 된다.

하나님의 출산 행위와 같은 아담의 계열을 쫓아서 나오는 자식이 아니다.

 

둘째 아담을 쫓아서 나와야 된다.

나중에 바울은, 바울 신학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아담이다.

아담을 쫓아서 나오는 혈통이 아니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서 나오는 혈통을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담의 혈통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성령을 쫓아 놨다고 그랬다.

육신의 혈통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으로 다시 대표되는 두 번째 아담이다.

진정한 사람이다.

 

출생뿐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 등에 제물을 태울 장작을 메고 올라가는 그 장면이나,

예수님이 등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서 올라가는 장면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이나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것을 예로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아들 이삭의 죽음과 대속을 통해서 그 혈통이 이제 이어져 나갈 거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가 막힌 스토리가 족장사에 들어있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삭이 죽지 않고 수풀에 걸린 수양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부활한다.

부활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그것이 이삭의 생애이다.

대속의 죽음 우리를 불러내심. 그 다음에 대속의 죽음.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심

이런 의미들이 들어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인가 했을 때 그 의미들이 원리로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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